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리랑카 내전 (문단 편집) == 길었던 전쟁의 종식 == 정부군과 반군의 불안정한 대치 상황은 LTTE가 정치적 자살골을 몇 차례나 넣으면서 정부군에 유리하게 기울었다. 시작은 2004년 3월 비나야카무르티 무랄리타란(Vinayagamoorthy Muralitharan)[* 카루나 삼촌(Karuna Amman)이라는 가명으로도 알려져 있다.]의 이탈이었다. 당시 LTTE 반군 대령으로서 동부 전선을 지휘하던 그는 6천명이 넘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정부군과 협상에 나섰는데, 총사령관이였던 프라바카란은 이러한 정부군과의 협상을 허락, 승인하지 않고 무랄리타란 부대를 '''공격'''했다.[* 최소한의 연락이나 대화조차 안 하고 같은 편을 공격한 것이다!] 결국 총사령관의 공격에 분노한 무랄리타란은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항복하여 LTTE에 관한 주요 정보들을 모두 제공해버렸다. 이 일로 2004년부터 LTTE 요충지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넘어가면서 LTTE는 전선에서 큰 타격을 받고 만다. 한편, 2004년 12월 인도양 일대를 강타한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은 스리랑카에도 큰 피해를 입혔는데, 동부 해안지대가 거점인 LTTE 역시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2005년 12월 스리랑카 대통령 선거에서 강경파인 야당 후보 [[마힌다 라자팍사]]가 온건파인 여당 후보 [[라닐 위크레메싱게]]를 상대로 신승을 거두었다. 여기에서도 LTTE는 자살골을 하나 더 넣었는데, 자기 점령지의 투표 자체를 거부하여 [[팀킬|라자팍사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투표 결과 라자팍사는 4,887,152표, 위크레메싱게는 4,706,366표를 차지했다. 득표율은 라자팍사 50.29%, 위크레메싱게 48.43%로 고작 1.86%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스리랑카 타밀족은 200만이 넘고 그들 중 상당수가 LTTE 점령지에 거주하니, 만일 LTTE가 선거를 보이콧하지 않았더라면 타밀족의 표심을 통해 정말로 결과가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라자팍사는 LTTE 무력 진압을 통한 내전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람이었고 대선 이후 새로 들어선 라자팍사 정부와 LTTE 반군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불안한 평화는 위기로 치달았다. 이 상황에서 LTTE는 수차례 자살폭탄테러를 저질러 스리랑카군의 요인을 암살하거나 부상입히는 마지막 자살골을 넣었다. 이것은 스리랑카 정부 내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시켰고, 반대급부로 온건파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 라사팍사 정부는 공약대로 이듬해 [[2006년]] 7월 자살폭탄테러를 이유로 LTTE를 다시 공격하여 내전이 재발했다. 더불어 스리랑카는 외교전으로도 나서서 [[미국]]을 주축으로 한 나라들이 타밀족의 자금력을 막고자 금융을 동결시켜 이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 줬다. 2007년 스리랑카 정부군은 LTTE가 점령한 반군 점령지를 하나씩 무력으로 뺏어 점령해 나가는 전술을 사용하여 LTTE 세력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LTTE는 스리랑카 북부와 동부 지역에 구축해 왔던 점령 지역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렸다. 결국 LTTE는 동부 지역들 대부분을 상실했고 2008년 라자팍사 정부가 2002년 체결되었던 LTTE와의 휴전 협정을 파기하면서 분쟁은 더욱 심각해졌다. 2007년 봄 대통령 [[마힌다 라자팍사|라자팍사]]는 이전에 정부군에 항복했던 무랄리타란을 각료급인 국민화해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LTTE 와해 공작에 나섰다. 2008년 5월에는 한해 전 LTTE에 공세를 펼쳐 빼앗은 동부 지역의 행정책임자로 무랄리타란을 임명했다. 무랄리타란은 지금도 정부 요직에서 잘 지내며 그를 비롯해 항복한 타밀 반군 측 다수는 스리랑카군 정규군으로 임용되어 장교가 되어 LTTE와 싸웠다. 게다가 무랄리타란의 이탈은 LTTE의 지도부를 분열시켰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프라바카란은 조직을 이탈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암살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게 대응해왔는데, 무랄리타란이 스리랑카 쪽으로 넘어가 권위에 큰 손상을 입었다. 무랄리타란의 이탈을 계기로 내부 분열도 터지면서 여러 세력으로 나누어져 서로 싸우고 더 나아가 LTTE 반군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반군 점령지와 전선에서 탈영하거나 스리랑카 정부군에 속속 항복, 귀순하며 스리랑카 정부군에 합세해 LTTE를 배신하기까지 했다. [[파일:external/si.wsj.net/NA-AV315_LANKA_NS_20090115185616.gif]] ▲ 2000년대 내전 말기 LTTE 반군의 점령지 상실. 짙은 녹색으로 칠해진 곳이 내전 당시 LTTE 반군이 점령, 통치했던 지역이다. [[2008년]] 말 스리랑카 정부군은 대대적인 LTTE 토벌 공세에 돌입하였고 2009년 1월 2일 LTTE의 최대 거점지인 북부 킬리노치치를 공격하면서 내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동년 1월 25일과 2월에는 물라이티부와 LTTE의 지휘본부가 있었던 중요 지하 [[벙커]]들까지 정부군에게 함락되면서 LTTE는 패색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킬리노치치와 물라이티부 등 상당수의 거점을 빼앗기게 된 LTTE 측은 라자팍사 대통령에게 휴전 협상을 제안했지만 라자팍사 대통령은 LTTE의 이러한 협상 제안을 거부했고 오히려 LTTE가 점령하고 있는 스리랑카 북부 지역에 대해 [[전투기]] [[공습]]과 무제한 포격 등으로 반군 진압을 더욱 밀어붙였다. 휴전 협상 제안이 거부되자, 정부군의 강력한 공세 하에서도 LTTE는 남아 있는 북부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진지 구축과 같은 방어전 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전세는 LTTE가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정부군에게 유리해져 있었고, LTTE는 스리랑카 북부 지역 점령지 상당수를 빼앗기고 좁은 해안가 지역으로 내몰려 패색이 짙어졌다. 거기에 정부군은 이스라엘의 협조로 위성 기술을 동원해 LTTE 간부들의 전화나 무전을 도청해 하나하나 찾아내어 싸그리 죽이기 시작한다. 팔레스타인 간부들을 이렇게 죽이던 이스라엘이니 철저하게 정보를 찾아냈다. 일례로 2008년 정부군 폭격으로 온 식구와 같이 몰살당한 통칭 찰스 대령[* LTTE 간부들은 본명을 숨기고 가명을 쓰다 보니 대충 아무개 대령같은 방식으로 각군 지휘관을 불렀다.]이 있었다. 그의 본명은 샨무르간나탄 라비상키르. 20년 넘게 LTTE 육군 부대 지휘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도 위성 도청으로 위치가 파악되어 스리랑카군이 번개같이 공습해 죽였다. 남은 건 팔과 몇몇 살점 뿐이었다고… 정보조작, 심리전 전문이던 발라세가람 칸디아르, 일명 발라지 대령 역시 찰스가 죽은 지 사흘 뒤에 정보가 노출되었다. 스리랑카 특수부대는 밤중에 기습 작전을 벌여 발라지 대령은 45발이 넘는 총알을 온 몸으로 맞아 사살되었다. 함께 있던 아내도 20발이 넘는 총알을 맞고 죽었으며 12살난 아들도 같이 사살되었다. 집에는 5명 경호원 겸 부하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고작 4발밖에 쏘지 못했으며 정부군 특수부대원 1명만 경상을 입었고, 이들도 모두 사살되었다. 샨무갈린람 시바샨키르, 일명 포투 암만(타밀어로 암만은 아저씨, 삼촌이라는 뜻)은 지장으로서 LTTE에서 존경받았던 육군 지휘관이었다. 포투 암만은 스리랑카를 탈출한 뒤 프라바카란과 인도 타밀나두 주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했지만, 2009년 5월 18일 스리랑카군에게 위치가 들켜 차에 탄 채로 온 식구와 같이 사살당했다. 프라바카란이 죽기 2시간 전이었다. 그리고 몇 척 안되는 해경 초계정을 빼앗아 조직한 씨 타이거스를 이끌며 압도적인 스리랑카 해군을 상대로 놀라운 전과를 거두고 바다를 통한 보급로를 장악하는 해상전 담당인 틸라이얌팔람 시바네산, 통칭 수사이 대령도 2009년 5월, 차량에 탄 채 스리랑카군 특수부대에게 50발이 넘는 총알을 맞고 사살당했다. 이렇듯이 고위 간부들이 하나하나 위치가 들켜 제거당하고 내전이 LTTE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프라바카란 LTTE 총사령관은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동년 5월 18일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인도로 탈출하려 했으나 이 정보를 사전에 알고 대기하던 스리랑카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결국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의 시체는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최대한 비켜나가도록 공습을 가했는데,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수건으로 이마에 크게 낸 상처와 뇌수가 터져나온 걸 가렸다.) 폭격에 맞았지만 시체는 머리와 이마(파편이 이마를 뚫어 즉사)를 빼고 온전했다. 이를 두고 가짜라고 소리가 나왔을 정도며, 그래도 얼굴이나 몸매에서 확실히 그임이 드러났다. 반대로 주변 경호원이나 부하들은 그야말로 시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뒤를 이은 셀바라사 파트마나탄이 [[정신승리|'그는 아직 살아 있다']]며 부정했고, [[파일:external/scd.observers.france24.com/tamoul1.jpg]] 이렇게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사진도 나왔으나 이 사진은 합성으로 드러났다. 이후 죽은 프라바카란의 [[https://www.outlookindia.com/public/uploads/gallery/20090520/prabhakaran_body2_20090520.jpg|시신]]이 스리랑카군에 의해 공개되면서 LTTE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파트마나탄이 남은 잔당을 이끌었지만 모든 게 허물어진 상황에서 소규모의 잔당을 이끌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7월 22일 무장 해제 및 패배를 선언하고 해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